상태창의 신

창작 판타지 썰. 경험치-레벨업의 제의적 성격에서 창안한 종교 경영물과 게임 회사 경영물의 혼종.

문장 부호만 수정한 프롤로그(조각글) 전문:


황무지의 어떤 폐허. 부서진 건축물의 부스러기가 흩날린다. 그곳에서 장검을 든 사내가 세 명의 도적들과 난투를 벌인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숫자였지만 사내의 칼솜씨는 뛰어났다. 사내는 도적들을 몰살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의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훌륭한 칼솜씨야.”

사내는 즉시 반응해 검끝을 등 뒤의 의문의 인물에게로 향한다.

의문의 인물의 차림새는 온통 검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검고 단촐한 코트. 목에 겨누어진 검에도 인물은 눈깜짝하지 않고 입을 연다.

“집주인에게 불청객이 칼을 겨누다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는 자신의 검이 손에서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검은 인물의 손에 들려 있다.

사내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인물은 인간이 아니다. 인물을 휘감은 휘광과 그림자의 부재가 그것을 설명했다.

“나는 키라, 이 성소의 주인이야.”

사내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는 신이라는 것을 처음 본 것이다.

“이 폐허가 당신에게 바쳐진 곳인 줄 몰랐습니다. 성스러운 곳을 더럽힌 것에 사죄드리죠. 노여움을 푸시길.”

신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오히려 그 반대야. 나는 살인의 신, 죽이는 것, 죽임당하는 것, 생사결, 전사(戰死)의 신이다. 그러니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내겐 일종의 제물인 셈이지.”

‘인신공양을 받는 살인의 신이라니 무슨 고대의 봉인된 악신 같은 건가.’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실례구나. 난 과거 이 땅을 지배했던 아트라 제국의 만신전의 일원이라고? 어엿한 기축 종교의 대신격이란 말씀.”

“마음을 읽었습니까?”

“신이니까.”

어쨌든, 이라고 말하며 신은 말을 이었다.

“뭐, 애초에 이곳은 도적 소굴이 된 지 오래였어. 부정이든 제물이든 사소한 죽음 같은 건 내 상관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웬 외계인이 나타나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나타나고 배기겠어? 신기하잖아.”

외계인!

“제가 이세계(異世界)에서 온 것을 아시는군요?”

사내가 말했다.

“하긴 신이시니까 당연하겠죠. 사실 그것이 저의 문제입니다. 저는 제가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거든요. 이유를 아십니까? 모처럼 신을 만났으니까 물어보고 싶어요.”

“글쎄… 이 세상의 창조자는 그렇게 꼼꼼한 성격이 아니었다, 정도일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그래서 가끔가다 이것저것 섞여 들어오곤 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쪽 입장에서는 대단한 실례였겠군.”

“그게 전부입니까? 뭔가 허무하군요. 그렇다면 이 세계에 와서 얻은 이 강한 힘은 무엇입니까?”

“푼돈으로 쥐여준 보상금 같은 느낌? 원래 이 세상은 주민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거든. 그들의 존재 그 자체라는 선물.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미 그들이 갖고 있는 걸 더 강하게 만들어주곤 하는 거야.”

“…그게 「치트」의 정체였군요.”

“치트? 그게 뭔데?” 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신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자기 말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렇게 만난 기념으로 나도 뭔가 선물을 줄게. 제물의 답례 겸, 근사한 칼솜씨 구경을 한 값 겸해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말이야.”

하지만 폐허가 다 돼서 도적 소굴이 된 성소를 가진 신이 들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가 비록 지식이 얕은 이방인이긴 했지만 키라라는 신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수상쩍은 컬트의 악신은 아닐지언정 잊혀진 신은 분명했다….

“진짜 실례구나, 이방인아.”

“이런, 또 읽혔네요. 하지만 생각을 어떡하란 말인가요?”

“그래도 무례해. 내가 잊혀진 건 형편없고 약한 신이어서가 아니야. 모시는 나라가 망했으니까 잊혀진 거지. 에즈린 그 개 같은 년….”

“에즈린이라면, 지금의 최고신 말인가요.”

“판탈라사, 의 최고신이겠지.” 신은 투덜거렸다.

“그래, 그래, 전사(戰死)의 신 주제에 패배에 불만을 표하는 건 조금 구차한 것 같네. 그래도 말이지, 난 꽤 강한 신격이야. 죽이는 자도 죽임당하는 자도 어디에나 있으니까. 넌 전사인 것 같은데, 안 그래? 죽고 죽이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내 전문이라고.”

하지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전 원래 전사가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까 이런 곳에 흘러들어와서 떠돌이 칼잡이 같은 게 되었습니다만, 제가 살던 곳에선 본래 쓰레기 같은 이세계물 IP 게임을 개발하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 프로그래머였죠. 무슨 말인지 모르신다면, 그냥 책상에서 일하는 지루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여튼 간에, 죽고 죽이는 문제라면 진절머리가 납니다. 오히려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게 제 소원입니다.”

“…음. 그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가….”

하기야 살인의 신에게 뭘 바라겠는가.

“진짜 실례라고, 그 생각. 아니 뭐, 필살의 검 같은 건 필요 없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든지?”

“그딴 건 딱히….”

그때, 문득 사내의 뇌리에 스친 것이 있었다.

“혹시 시스템을 가질 수 있을까요? 상태창, 스테이터스창, 아무튼 뭐시기?”

“…시스템이 뭔데?”

“「치트」는 있는데 정작 「시스템」은 없는 건 뭔가 언밸런스하잖아요. 경험치 시스템 같은 게 있으면 동기부여도 되고 좋을 거 같은데.”

“아니 잠깐, 알아들을 말을 해 봐.”

잠깐의 혼란스러운 대화가 지나간 뒤, 신은 요구사항을 정리했다.

“즉, 뭔가를 죽이면 그만큼 강해지고 싶다?”

끄덕.

“그리고 ‘상태창’이라고 외치면 네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판때기가 눈앞에 나타나야 하는데, 거기에는 너에 대한 절대적이고 전지적인 수치가 적혀 있어야 하고?”

끄덕.

“…외계인들은 이상하구나….”

“좀 어처구니없는 부탁이었나요?” 사내는 소심하게 말했다.

“일단, 죽고 죽이는 문제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면서 뭔가를 죽이는 것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폭력적인 소원을 비는 게 이해가 안되는데….”

“저희 문화 같은 겁니다, 헤헤… 말하자면….”

외계인들은 도대체 뭘 하고 산단 말인가? 신은 속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다.

“그래 음….”

신은 조심스럽게 선언했다.

“…무언가를 죽이고 그에 따라 강해지는 건 놀라우리만치 내 권능이랑 맞닿아 있는 것 같네. 결국 나에게 제물을 바치고 축복을 얻는다는 거잖아? 뭐, 일단 죽여놓고 바치는 게 아니라 바치기 위해 죽이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지만 말이지.”

“그렇다면-”

“그래, 그 「경험치」인지 뭔지 하는 건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앗싸!”

신의 확언에 사내는 환호했다.

“그리고 상태창인지 명태창인지 하는 건 솔직히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생략. 나중에 기분이 들면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고.”

신은 손을 사내의 머리에 축복하듯 얹었다.

“자, 됐어.”

“이게 단가요?”

“그럼 뭘 원했니?”

그렇게 사내는 「경험치 시스템」을 얻었고, 신과의 기묘한 만남을 끝냈다.

그 뒤로 삼 년이 흘렀다.

잊혀진 신, 키라는 여태껏 그래왔듯 그동안도 한가했다. 약속에 따라, 가끔 이방인이 바치는 제물에 반사적으로 축복을 내려주긴 했지만,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그동안 그는 전장에서 전사들이 눈먼 화살을 피하게 해주거나, 반대로 허무하게 죽게 하거나, 하면서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잊혀진 성소의 대지에 다시 피가 스며들었다. 그 자체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이방인의 칼에 의해 흐른 피라는 점이 눈여겨볼 만했다.

“뭐야, 또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죄송해요, 다시 뵐 방법을 몰라서… 전과 같은 방법을 재현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사내, 정규식은 신에게 감히 말했다.

“저하고 사업 하나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