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P의 일기

As Dusk Descends(땅거미 질 무렵에) 팬픽션. 천호랑 저.

진짜로. 제가 작성한 글이 아닙니다. 본래 10월 3일 사서함에 투고되었던 것을(1, 2, 3, 4), 작성자분의 허가를 받아 이곳에 전문의 합본을 게재합니다. 무려 9천 자에 달하는 엄청난 정성의 분량! 부디 함께 즐겨주세요.


<흡혈귀 P의 일기>

-5월 3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름 이 상황에 정착하고 있다. 강인한 힘과 늙지 않는 걸 넘어 회춘한 몸은 버리기에는 꽤나 아까운 것들이다. 물론 가끔씩 통제할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리긴 했지만, 마법은 많은 걸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인간일 적의 자산(아니면 유산이라고 말해야 할까?)도.

새로운 생활도 점차 익숙해졌다. 일몰 10분 전 즈음에 일어난다(금일 20시 15분경 기상). 오늘 읽을 글을 정한다(Ju, Y. (1922). 그건 그녀가 아니야. 2nd ed. 유월당.). 때때로 산책을 한다(금일 생략). 굳이 옷은 갈아입지 않고 있다. 주 1회 사냥을 한다. 그리고 매일 식사를 한다…

그렇다. 식사. 이 식사가 문제이다.

이곳에 살면서 나는 음식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진 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그 영국에 살고 있다. 생선튀김을 대표 요리로 들이대는 곳에 살면서 식사에 대해 기대를 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다.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고 싶다고 원숭이 손한테 빈 것 같은 상황이랄까. 이제 죽을 때까지 그 음식만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좋을 거 같다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군. 아직 그런 고문을 겪어본 적이 없을 거일 테니까.

피맛이 거기서 거기라는 이들도 있지만, 내겐 모든 피 맛이 똑같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인간일 적 궁금해했던 생물 개체별 피 맛의 차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흡혈귀가 된 이후 얻은 부수입이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차이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솔직히 하도 먹었더니 질려서 이제 차이에 더 둔해진 것도 있다. 지금의 나라면 전부인과 딸의 피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알코올 향 차이 정도를 느낄까? 부인은 꽤나 애주가니까 술냄새가 꽤 강하게 날 거 같다. 이렇게 적어보니 구분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블라인드 테스트라도 시도해 볼까. 적당히 수배해 봐야겠다.



-5월 4일-

상대를 너무 적당히 정했다. 입만 버렸다. 입은 헹궜지만 당장 자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실험 기록 일부와 도중의 감상을 첨부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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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도중의 감상. 공유본 제작 시 이 부분은 옮기지 말 것.


<목적>

음주 전후의 혈액맛 변화


<도구 및 피험자>

도구:

3cc 일회용 주사기, Vampire Cabernet Sauvignon 와인(1988년 산, 13.5%)

*이걸 드디어 열게 되는군.

피험자:

피험자1(인간, 2X세), 피험자2(흡혈귀, XX세), 피험자3(흡혈귀, XX세), 피험자4(흡혈귀, XX세), 피험자5(늑대인간, XX세)

*이번 사냥감에게 인식 조작이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실험 과정>

1. 공복 상태(최소 8시간 금식)의 피험자들에게서 혈액 3cc를 채취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위해, 샘플들의 채취자와 채혈 당시 상태를 기록하고 무작위 번호를 매기는 작업은 조수에게 시킨다. 혈액 샘플은 실온에 보관한다.

2. 와인 150ml를 피험자들에게 마시게 한다.

3. 5분 후 다시 피험자들에게서 채혈한다. 조수가 채취자, 채혈 시 상태를 기록하고 무작위 번호를 매긴다. 위와 마찬가지로 샘플은 실온 보관한다.

4.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 혈액 샘플을 입에 머금고 조금씩 삼키며 맛을 기록한다. 섭취 후 물로 혀를 세척한다. 이를 10회 반복한다.

5. 채취자 및 채혈 상태를 확인한다. 결과를 분석한다.


<실험 결과>

샘플46: 부드럽다. 약간의 짠맛과 강한 피 맛.

*익숙한 걸로 보아 이게 인간 피인 것 같다.

샘플5: 처음에는 약한 쇠맛이 나다가 갈수록 텁텁해짐. 뒷맛이 오랫동안 남음. 불쾌한 맛.

*흡혈귀? 늑대인간?

샘플26: 강한 피 맛. 샘플 46에 약간의 향이 추가된 맛. 과일향과 알코올 향으로 추정.

*음주 후 인간피로 추정. 주종에 따른 맛의 변화도 있을까.

샘플88: 무(無) 맛. 수돗물 냄새라도 느껴지는 물보다도 아무 맛이 안 난다.

샘플12: 약한 쓴 맛이 느껴진 직후 사라짐. 이후 계속 무맛.

샘플22: 무맛.

*무맛 샘플이 많은 걸로 보아 5는 늑대인간이었을 듯. 재실험한다면 피험자 비율도 신경 쓸 것.

샘플97: 무맛.

샘플19: 무맛.

샘플30: 무맛.

*6 연속 아무 맛 없는 샘플이라니 샘플이 잘 섞이지 않은 것 같다.

샘플18: 이딴쓰레기같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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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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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 메모. X표 친 항목은 결과 보고서에 옮기지 말 것.


샘플-피험자 번호-채혈 시 상태

46-피험자 1-음주 전 / 5-5-전 / 26-1-후 /88-2-전/12-4-후/22-4-전/97-3-전/19-2-후/30-3-후/ 18-5-후


-인간과 늑대인간은 음주 전후로 혈액 맛이 변화. 특히, 늑대인간 종족에서 극명한 변화가 나타남.

-인간: 새로운 향이 혈액에서 느껴짐. 사람들이 묘사하는 와인 맛의 특징과 유사.

-흡혈귀: 샘플12에서 느껴진 쓴 맛은 알코올 맛? 다른 샘플에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혀가 둔해져서 그런 걸 수도. 현재로서는 유의미한 결과로 보기 힘듦.

X늑대인간: 음주 전 맛없음. 음주 후 끔찍함.

-늑대인간: 음주 후 형용하기 힘든 불쾌한 맛으로 변화. 맛이 오래 남는다는 특징이 알코올 섭취 후 극대화. 개체의 특성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이하 한계점.

-피험자의 종족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아, 비슷한 맛이 나는 샘플의 숫자로 채혈자의 종족을 알아채게 됨.

-피험자의 수가 적음.

-시음한 사람이 본인뿐.

-피로도가 올라 갈수록 혀가 둔감해짐

X늑대인간 혈액 섭취 후에는 실험 진행 불가


이하 의문점

X늑대인간 피가 맛없는 이유

-알코올 섭취 후 경과 시간에 따른 변화는?

-채혈 시 혈중 알코올 농도는?

-맛 변화에 주종이 끼치는 영향

X술 마신 늑대인간 피가 맛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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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인 영감의 인도를 따라, 사냥감과 부하들을 이용해 어제 실험을 진행했었다. 급한 저녁 초대 메시지를 인간이 받아들여서 다행이다. 주말이라 한가했다고 자기 입으로는 그러던데, 부디 본인이 필요한 중요한 일을 미뤄두고 온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부족한 피험자의 수를 늘리려 기상 후 20시 20분경 부하들을 호출했다. 실험의 정확도를 올리려 그런 것이나, 결과적으로 악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명한테는 다른 일을 시켰을 텐데.

이 실험의 목적이었던 음주에 따른 혈액 맛 변화는 일단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원래 궁금했던 것은 장기간 자주 술을 마신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아닌가. 결국 무의미한 고행이었다.

솔직히 그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5번 샘플도 별로였지만, 18번 샘플이 충격적으로 맛이 없다. 원수한테조차 미안해서 선물하지 못할 것 같은 맛으로, 한여름의 따사로운 햇살 그 자체이다. 이건 음주 후 늑대인간 혈액 샘플로 판명되었다. 찾아보니 개는 알코올을 못 소화시킨다는데, 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밑준비도 번거로웠다. 인식을 조작하고 술도 전부 다 마시게 유도해야 했다. 피 좀 뽑자고 하는 일 치고는 지나치게 귀찮다. 게다가 18번 섭취 후 당장 쉬고 싶을 때, 인간은 인간대로 정리해야 했다(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18피를 마신 후 입가심용으로 사용한 후 언제나와 같이 처리했다. 부디 더 손 갈 일이 없기를 바란다.

준비와 뒷정리로 고생했던 만큼 오늘은 집에서 휴식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987, 1st ed.)에서 '개' 항목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늑대인간 생태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별개로 실험 결과는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일단 주요 부분은 메모해 두었으니, 내일 실험 기록 합본을 만들어야겠다.



-5월 6일-

저번 실험의 첫 번째 성과는 늑대인간 피에 입도 대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 것이고(어떻게 이딴 피를 먹게 할 수가 있지?) 두 번째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강렬한 욕망이 생긴 것이다.

음식을 좀 제대로 먹고 싶다. 비록 평생 먹어본 그 어떤 영국 음식보다도 피가 맛있긴 하지만, 식사하는 척이 아닌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싶다. 애피타이저로는 샐러드가 좋다. 디저트로는 라이스 푸딩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메인으로는…젠장, 어쨌든 액체류만 아니면 된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다른 걸 먹겠다는 생각만으로 본능이 경종을 울려댄다. 그렇지만 이미 그걸 무시한 적이 있지 않나? 물론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아픈 꼴은 겪지 않았겠지만,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무얼 먹더라도 술 마신 늑대인간 피보다는 맛있을 것 같다.

중요한 음식 메뉴로는 블랙푸딩을 선정했다. 생전 한 번도 먹은 적 없는 메뉴지만 나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어제 입가심을 하며 느낀 것인데, 인간 피는 정말 최상의 식재료다. 이를 베이스로 삼은 음식이 다른 음식보다 즐거이 먹을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실험 기록 합본 정리 후 요리책(Westenra, L. 웨스턴라의 주방. 1st ed. 유월관.)을 읽었다. 표지 사진이 맛있어 보여 구매한 요리책에 마침 블랙푸딩 레시피가 있다. 부하들에게 재료 준비를 지시해 두었다.

다소 손은 가겠지만, 내일 조리를 시도해 볼 것이다.



-5월 7일-

요리했다. 내가 먹기 위해 요리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용한 레시피 및 메모를 옮겨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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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도중에 직접 적은 메모. 본래 요리책에는 없던 부분.


<재료>

약 3파운드 분량 기준.

-신선한 돼지 피 4컵

-소금 2와 1/2 티스푼

-자른귀리 1과 1/2컵

-잘게 다진 비계 2컵

-잘게 다진 큰 노란 양파 1개

-우유 1컵

-간 후추 1과 1/2 티스푼

-간 올스파이스 1 티스푼


<요리법>

-1단계

오븐을 325°F로 예열한 후, 오븐용 유리 용기 2개에 기름을 바릅니다. (유리 용기가 없으면 금속 용기에 종이포일을 깔아 사용합니다. 이는 블랙푸딩이 금속과 반응하여 이취가 나는 것을 방지합니다.)

*오븐용 용기가 아닌 그릇을 사용해 집에서 그릇을 깨 먹은 적이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내 얘기는 아니다.


-2단계

피에 소금 1 티스푼을 섞습니다.

*그냥 이대로 먹고 싶다.


-3단계

물 2와 1/2컵을 끓이고 귀리를 넣어 저어줍니다. 부드럽지만 흐물거리지는 않을 정도까지, 가끔 저어주며 15분 동안 끓입니다.


-4단계

피을 고운 체에 거른 후 큰 그릇에 부어 덩어리를 제거합니다.

*지금이라도 먹을까.


-5단계

비계, 양파, 우유, 후추, 올스파이스 및 남은 1과 1/2 티스푼의 소금을 피에 넣고 저어줍니다.

*생각보다 비계가 많이 들어간다. 전부인은 지방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걸 보면 식겁할 수도 있겠다.


-6단계

오트밀을 넣고 섞어줍니다.

*딸은 오트밀을 싫어했다. 먹일 때마다 전쟁이었다.

*나도 오트밀이 싫다.


-7단계

덩어리 팬에 혼합물을 나누고 포일로 덮고 단단해질 때까지 1시간 동안 굽습니다. 완전히 식혀주세요. 장기간 사용하려면 비닐 랩으로 밀봉하고 냉동 보관하거나 최대 일주일 동안 냉장고에 보관하세요.

*부엌에 서서히 냄새가 가득 찬다. 매일매일 이런 냄새가 집에 가득한 때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과거의 향을 맡으면서 추억에 잠긴다. 같은 추억을 가진 특별한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에 기쁨이든 슬픔이든, 하여튼 무엇이든 느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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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했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못 먹는 걸로 음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은 걸 만들어낸 것이다.

솔직히 요리 중에도 느끼긴 했다. 구체적으로는 1단계 후에 재료를 재확인할 때 느끼기 시작했다. 피가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 외의 재료도 많이 들어갔다. 그렇지만 시작한 게 아까워 도중에 멈출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의욕을 내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 맛을 제대로 평가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먹어주면 좋겠다. 그러니까, 부하 말고 다른 사람 말이다. 특히 늑대인간 빼고.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다.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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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단계

덩어리에서 약 1/2인치 두께로 조각내어 자릅니다. 가장자리가 약간 바삭하고 갈색이 될 때까지 버터나 기름에 볶은 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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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 40분경, 약속한 시간에 맞춰 웨스턴라 여사가 도착했다. 그렇다. 그 <웨스턴라의 주방> 작가이다. 일주일 안에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여사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부엌으로 안내한 후, 나는 블랙푸딩을 꺼내 볶으며 여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음식에 관한 대화들이었다. 주로 무얼 먹는지, 직접 요리하는지, 자주 하는지 등등. 나로서는 다소 곤란한 질문들이었다. 초대한 이유가 이유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구실을 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요리는 금방 완성되었다. 나는 빠르게 블랙푸딩을 여사 앞으로 옮겼다. 여사는 신중하게 한 점을 집어 들고 천천히 씹었다. 어쩐지 표정이 미묘했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떠신지요? 입에는 맞으신가요?'

'음-', 여사가 천천히 말했다:-

'나쁘지 않아요. 사실, 좀 짠 것만 빼면 꽤 훌륭한 걸요.'

돼지와 인간에게 맞춰져 있는 레시피를 사용하다 보니 간이 잘 안 맞은 듯하다. 여사가 흡혈귀였다면 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빠르게 솔직한 답을 해준 것은 다행이다. 실망스러운 결과이지만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레시피가 훌륭한 덕분이지요.'

'무슨, 아부하실 필요 없어요. 진짜로 훌륭했다면 책이 그보다는 더 팔렸겠죠.'

여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읊조리듯 말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써낸 책이었는데, 재판도 못하다니. 정말 실망스럽다니까요.'

우연히도 여사와 내 기분이 일치했다.

'진가를 다른 사람이 알아봐 주지 못하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지요.'

'그것도 그렇지만요, 사람들이 요리책에 관심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의문을 담아 질문했다.

'생각해 봐요. 사실 사람은 배만 채우면 살아갈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고급 레스토랑은 왜 있는 거고 식당마다 요리는 왜 다른 걸까요? 이건 요리와 맛의 추구는 인간의 최대 특징이자 본성이란 그 자체죠.'

요 근래 들은 것 중에 가장 지당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다른 종과는 구별되죠. 동물이 사료를 먹듯이,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인간은 미쳐버리고 말 걸요.'

얼추 맞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미식을 원하는 게 인간만은 아니지요.'

'그런가요?'

'개 키워보신 적 있나요? 가끔 특식을 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특히 뼈다귀에 붙은 고기라도 주는 날에는, 골수까지 행복한 표정으로 빨아먹던 걸요.'

'잘 아시네요. 키워보신 적 있나 봐요.'

'개는 아니지만, 비슷한 건 데리고 있습니다.'

여사는 즐겁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개랑 다른 점이라면, 인간은 더욱 다양한 요리법으로 맛을 추구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도 그 능력을 포기한 사람도 많고요. 그래서 오늘 초대받아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제가 웨스턴라 여사님의 요리책에 관심을 가져서요?'

'그렇죠! 음식과 만드는 법에, 그것도 제 요리법에 관심을 가져줘서요. 요즘 그런 거에 관심 없는 사람이 정말 많답니다? 요리 연구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맛 음식을 추구해 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그러면 엄청 끔찍한 맛의 음식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까요?'

'당연하죠! 어떤 목표든 가진다는 건,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에요.'

술 마신 늑대인간의 피를 맛보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목표가 있어서 이 책을 가지고 있고, 오늘 저한테 직접 요리해서 대접하기까지 한 거잖아요. 어떤 맛을 추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그렇지요.'

'어떤 식으로 맛을 내고 싶은 건지 말해보지 않을래요? 그 방향으로 레시피를 개량해 줄 테니까요. 식사의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긴, 명확한 이미지가 없을 수도 있죠. 그럼 다른 음식에 비유해보는 건 어떨까요? 파운드케이크 같은 식감이라든지 하는 식으로요.'

그런 거라면 계속 생각하던 게 있다.

'표지 사진 같은 맛이 나면 좋겠습니다.'

'표지 사진이요?'

'네. 그게 제가 <웨스턴라의 주방>을 산 이유거든요. 표지 사진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음...뭘 원하는지 알겠다고 말하고 싶지만...표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 같네요. 어떤 음식을 말하는 건가요?'

'기억나지 않는다니 아쉽네요. 그렇지만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여사가 화제를 바꿨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블랙푸딩 맛이 제가 만들었던 거랑은 좀 다르네요. 특이한 재료나 향신료를 썼나요?'

'그런가요? 제가 자주 쓰는 재료를 썼는데요.'

'어쩌면 비계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무슨 동물의 비계를 썼나요?'

'피랑 똑같은 동물 거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돼지 거를 샀겠네요.'

'부끄럽지만 돼지 피는 구매가 힘들었어서요. 다행히 따로 구하는 걸 주변 사람들이 도와줬습니다.'

'하긴, 파는 곳이 요즘은 많지 않지요. 그러면은 어떤 피를...?'

말하던 중 여사가 멈칫했다. 서서히 공포에 질리는 표정을 보니 표지 사진을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나로서는 지금까지 여사가 그걸 잊고 있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잘 나온 본인 사진이라면 기억할 법도 한데.

여사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저 안에 든 피라면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것 같다.

'그것도 뭐...'

나는 여사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맛을 평가받으면 바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식사자리는 꽤 길어졌다. 그러나 모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아주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준비할 가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사 자체에도 소득이 있었다. 웨스턴라 여사는 확실히 미식가였던 것 같다. 피 깊숙이에서부터 올라오는 수많은 향신료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비록 인간에게는 관심받지 못했을지언정, 여사가 추구해 온 맛은 그 흔적을 착실히 남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혈액 맛에 술뿐만 아니라 음식도 영향을 끼친다는 증명이다. 술의 맛은 금방 영향을 끼치고 금방 사라지지만, 음식의 맛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누적된 후 오랜 시간 동안 영향을 끼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입속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절로 흥분된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게 한 다음 피를 마시면 저번보다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안가에 사는 어부에게서는 해산물 맛이 나려나. 어부에게 화이트 와인을 마시게 한 다음 피를 마시는 건 어떨까?

아니면 아예 다른 것의 영향을 알아봐도 괜찮을 것이다. 예컨대, 커피 같은 거.

다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요리와 맛의 추구는 흡혈귀의 본성이기도 하니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