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의 보아구렁이
4화. 초심자의 행운 (1)
“호그와트야!” 신이 잔뜩 오른 목소리였다. “호그와트라고!”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아. 아니, 처음인가?” 해리가 웃었다. “평소에는 반대였잖아. 내가 즐거워하면, 너는 어린애 같은 짓 그만하라며 혼을 내고.”
“오랜만이라니, 우리 초면 아니었니?” 꿈속의 인물은 짐짓 시치미를 떼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우린 계속 함께 있었잖아…….”
“아, ‘해리’. 하지만 ‘너’도 ‘나’도 꿈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한걸. 결국엔 자기 자신과의 대화일 뿐이야. 정말 ‘우리’의 존재에 연속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 말은 언제나 어려워.” 해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난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어.”
“하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호그와트! 그리고 지팡이! 드디어!”
꿈속의 인물은 요술 지팡이를 휙 휘둘렀다. 그러자 백금으로 장식된 암녹색 벨벳 왕좌가 펑 하고 나타났다. 바닥에는 검은 구름이 깔렸고, 그 아래에 하늘 높이 내려다본 세상이 펼쳐졌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어 해리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었다.
“이젠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렇게 외치며 꿈속의 인물은 두 팔을 쭉 뻗고는 푹신한 왕좌에 묻히듯 앉았다.
“과장이 너무 심하잖아!” 해리가 킥킥 웃었다. “솔직히 실감이 안 나. 너무 형편이 좋잖아. 어쩌면 전부 내 망상일지도 몰라…….”
“하지만 호그와트는 진짜야.” 꿈속의 인물이 말했다. “거긴 최고라고! 마침내 ‘진짜 집’에 돌아가는 거야…….”
“집인지는 모르겠고, 기숙학교인 건 확실히 마음에 드네. 이모네와 드디어 떨어질 수 있잖아…….” 해리는 구름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왕좌는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하늘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꿈속의 인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지팡이를 까딱여 거울을 만들었다. 거울은 왕좌에 위풍당당하게 앉은 주인의 모습을 비추었다. 특별히 치장된 구석은 없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건방지게 뻗쳐 있었으며,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에는 번개 모양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깡마른 몸에 걸쳐진 옷은 허름하고 헐렁했다. 동그란 안경과 그 너머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도 변한 구석 없이 그대로였다.
평소와 같은 해리 포터였다.
* * *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해리는 친척들의 눈치를 봐 자체적으로 근신할 겸 자기 방 안에 콕 박혀 살았다. 사실, 교과서들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마법을 연습하느라 바빠 나오려고 해도 그럴 틈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문학과 약초학, 마법약은 방에서 실습하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일반 마법과 변신술 교과서에 적힌 대부분의 주문은 지팡이와 방 안에 널린 잡동사니만 가지고도 충분히 연습할 수 있었다. 갓 지팡이를 얻은 햇병아리들을 위한 과정답게 주문들은 하나같이 쉬웠다.
또한 해리는 플러리시 앤 블러트 서점에 헤드위그(해그리드가 사 준 올빼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를 보내 저주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주문했다. 하나같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저주는 써 보지 못했고, 그나마도 자기 자신에게 쓴 것이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해리에게도 선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에게 사용해볼 날을 꿈꾸긴 했다.
이상한 점은 마법서의 내용들이 하나같이 어디선가 본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해리는 그런 기시감을 예전부터 많이 느껴왔다. 마땅히 몰랐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거나, 실제로 알고 있는 것 말이다. 다만 예로부터 ‘조숙하다’(그 앞에는 보통 ‘기분 나쁠 정도로’ 내지 ‘쓸데없이’와 비슷한 말이 붙어 있곤 했다)라는 평을 들어 왔기에 기시감도 그 일환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그래봤자 다 살면서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들이므로, 자기도 모르는 새 어디선가 주워듣고 익힌 것이리라. 그것이 아이의 본분이니까.
하지만 마법의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미리 주워듣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는 기억이 있는 한 마법세계 바깥에서 죽 살아왔다. 또한 당연히, 여태껏 ‘진짜’ 마법적 지식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용한 적도 없었다.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그냥 기분 탓, 무언가의 착각이라는 찜찜한 결론을 내렸다.
해리의 방 바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마법사 거한(그새 해리는 신비한 생물 ‘거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교과서로부터 배웠다)으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공황에 빠져 있었다.
두들리의 돼지 꼬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해리가 이 궁극적인 폭력의 형태에 감명받는 동안, 버논과 페투니아는 아들의 돼지 꼬리를 조용히 없앨 정형외과를 찾아다녔다. 해리는 자기가 한번 없애볼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버논과 페투니아는 해리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그 자체로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특별히 해리가 위협하지 않아도 그를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평상시 그들은 고아인 해리를 돌봐줌으로써 그를 함부로 대할 권리를 얻은 것처럼 굴었다.
호그와트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못 하는 분위기였다. 암묵적으로 해리가 그곳에 가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 같기는 했다. 다만 해리로선 본래 예정되었었던 스톤월 중학교의 입학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9월 1일이 되었다.
해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런던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여비는 충분했다. 그린고트에 갔을 때 꺼낸 돈을 일부 파운드로 바꿔 두었기 때문이다.
어째 집안이 부산스러웠다.
“오늘 스멜팅스도 학기를 시작하던가요?”
오랜만에 나타난 해리의 신형에 페투니아 이모가 꺅 소리를 냈다.
“아니, 두들리의 꼬리를 제거하러 런던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바로 네-녀-석 때문에 생긴 그놈의 꼬리 말이지. 이 망할 놈아.” 버논 이모부가 답했다.
“오, 런던! 잘됐네.” 해리가 생글 웃었다. “저는 킹스크로스역에서 내려요!”
버논의 얼굴이 바퀴벌레를 씹은 듯 구겨졌다.
결국 그들은 해리를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두들리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며 해리는 내심 즐거움을 느꼈다. 흥겨운 여행이었다.
“태워줘서 고마웠어! 잘 가!”
해리는 친애하는 친척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해리를 내려주자마자 도망치듯 떠났다.
역에 혼자 남은 해리는 해그리드가 준 표를 다시금 살펴봤다. 표에는 분명히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트렁크와 새장이 든 짐수레를 밀면서 9번 승강장을 지나쳐 10번 승강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에는 빈 벽뿐,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라고 적힌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해그리드가 딱히 뭐라고 말해줬던 것은 없지만, 해리는 들어가는 방법을 ‘알았다’.
해리는 눈 깜짝 않고 9번과 10번 승강장 사이의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호그와트 급행열차, 11시’
굴뚝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진홍색 증기기관차가 나타났다.
9와 4분의 3번 승강장에 들어온 것이다.
‘좋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새 출발 하는 거야.’
직후 해리는 자신에게 다짐하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에겐 ‘친구 사귀기’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리틀 위닝의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해리의 인간관계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의 깡패였던 두들리가 해리를 표적으로 삼아 못살게 굴며 친구들을 모조리 쫓아냈기 때문이다(신세 지는 친척 집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낡고 헐렁한 옷에 깨진 안경을 낀 이상한 아이 해리는 완전히 학교의 웃음거리, 요컨대 ‘그래도 되는 아이’였다. 적어도 자제력을 잃고 교실과 복도를 난장판으로 만들기 이전까지는 그랬다. 한번 선을 넘고 막 나가기 시작한 뒤에는 모두가 해리를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친구가 없는 것은 결과적으로 똑같았다.
해리는 초심자의 행운이란 걸 믿어보기로 했다. 새 학교, 새 학기다. 이전의 해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일이 잘못된다 해도, 다 해리 같은 어린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전과 같은 취급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손수레를 끌었다. 출발하기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음에도 사람은 꽤 많았다. 해리와 달리 이 모든 절차에 새로움이라고는 느끼지 못해 따분한 티를 풀풀 내는 나이 많은 학생이 짐을 요술 지팡이로 들어 옮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느 한쪽에선 십 대 중반 남자 특유의 우렁우렁한 쇳소리로 떠들어 대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해리 또래의 소년과 젊은 부부가 포옹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우리 드레이코, 혼자 가서 잘 할 수 있지? 자기 전에 양치 꼭 해야 해……. 엄마가 매일 과자 보내줄게, 친구들과 나눠 먹으렴…….”
“저도 걱정이 돼요,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떡하죠? 아빠, 그리고 제가 말했던 빗자루…….”
그 꼴을 본 해리의 배알이 괜히 뒤틀렸다. 뒤틀린 인생 탓에, 그는 모든 종류의 사이좋은 가족이란 것을 격렬히 증오하게 된 것이었다. 해리는 애꿎은 사람들을 향해 공연히 눈총을 흘기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정확히는, 서두르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해리는 그 소년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더 공교롭게도, 해리는 그 소년과 구면이었다.
“앗! 해리 포터다! 아빠! 보세요! 제가 말했던 걔예요!”
바로 옷가게에서 말을 걸어왔던 성가신 녀석이었다.
* * *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호그와트 급행열차의 한 객실, 거기에 앉은 해리의 앞에는 옷가게에서, 그리고 승강장에서 또 만났던 소년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드레이코 말포이였다. 드레이코의 양옆에는 험상궂고 힘깨나 쓰게 생긴 남자아이가 한 명씩 달라붙어 있었다.
“크레이브, 그리고 고일이야.”
드레이코의 소개에 맞춰 두 똘마니(그들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밖에 달리 적절한 말이 없는 것 같았다)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리가 영혼 없이 말했다. “난 해리야. 드레이코한테서 들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음.”
“포터. 이제 우린 전통 있는 호그와트의 학생이야. 서로를 성으로 부르는 건 오랜 관습이라고. 알았어? 어린애처럼 말하면 안 돼.”
해리는 즉시 드레이코가 자신의 이상한 이름을 부끄러워해서 성으로 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무례한 추측을 했다. 하지만 뭐, 본인의 희망이 그렇다면야.
“알았어, 말포이.”
해리는 드레이코, 아니 말포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뾰족하게 싫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아낌없이 사랑받아 온 티가 풀풀 나는 철부지 도련님인 게 싫었고, 말을 질질 늘이는 말버릇도 거슬렸고, 심지어 금발인 점까지 얄미웠다. 초대면에 뜬금없이 부모의 출신을 추측하며 은근히 비웃었던 게 기분 나빴고(아닌 척해줬을 뿐이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똘마니를 데리고 다니는 게 두들리를 연상시켜서 절로 감정이 험악해졌다.
그런데도 어쩌다 그와 동석하게 되었느냐면, 승강장에서 말포이 가족에게 그야말로 꼼짝없이 붙잡혔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냥 사랑하는 부모님께 ‘자기가 만난 해리 포터’를 소개하고 싶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사귄 새 친구’에게 잘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말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해리는, 글쎄, 모두가 새 친구를 사귀기를 고대하는 새 학기 첫날이다. 그것은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날에, ‘우리가 언제 친구였는데?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는걸. 난 다른 친구를 사귀러 갈 테니까 잘 있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건 듣는 사람에게는 물론 말하는 사람에게도 과하게 잔인한 처사 아닌가…….
일단 그렇게 되자 열차에서의 동석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해리는 생각했다. 자신의 초심자의 행운이 ‘운 나쁘게’ 형편없이 낭비된 것이든, 그냥 제게 주어진 모든 종류의 행운이란 게 이따위인 것이든, 앞으로 행운이란 건 기대도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성에 안 차는 마음이야 어떻든 지금의 해리에게는 친구가 절실했다. 별 이유 없이 다가오는 사람을 쳐낼 만큼 형편이 여유롭지 않았다. 비록 첫인상은 나빴지만, 해리는 이 말포이라는 아이와 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채 하루도 가지 않고 형편없이 깨지게 되었다.
발행
k
Cael2022년 8월 27일 17:44:45
익명2022년 8월 27일 19:12:54
Charming Princess2022년 8월 27일 20:35:57